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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살수대첩보다 더 위대한 사수대첩을 아는가?

스톤^^ 2007. 4. 8. 00:25

649년,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한 당의 내정은 여러움이 많았다. 한편 고구려도 영류왕의 실정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비록 이기기는 하였으나 당을 정복하지 못했고 많은 재정을 소진했다. 게다가 장안의 공격과정에서 연개소문은 중병을 입어 철군함으로써 불안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로부터 5년후인 654년,백제의 공격을 받던 신라는 김춘추와 아들 법민을 당에 파견하여 향후,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그로부터 1년후 655년 신라의 새로운 왕이 된 김춘추는 당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측천무후와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방법보다는 많은 뇌물을 써 고구려 내분을 유도하고 주변국과 협공하여 고구려를 정복한다는 소위 '우회협공' 전략이었다.

 

      

 

6년 후인 660년 여름, 측천무후는 소정방, 유인궤, 설인귀 등에게 20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군과 연합하여 기습적으로 백제를 공격토록 하였는바, 불시에 대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의 의자왕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저번(왜=저팬)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고구려는 당시 연개소문이 병중에 있어 보고하지 않았는데, 이때 연개소문은 장안성 공격때 독화살에 저격된 원인으로 중병상태에 있었다. 오늘날 일본인 저번군은 백제성이 함락된 뒤에 도착하여 3일간 전투를 치르다가 돌아갔다고 일본서에 전해진다.

 

660년 10월, 당군 20만은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기습적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과 백제군은 달랐다. 일주일을 밤낮을 가리지않고 공격했으나 성은 도저히 함락될 것 같지 않았고 660년 12월부터는 큰 눈이 내려 소정방군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되었다, 기진맥진한 당군 소정방의20만군은 살수대첩때 전멸했던 악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급해진 소정방은 이러한 처지를 본국과 동맹국인 신라에 파발말을 보내 급히 지원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당나라의 황제였던 측천무후는, 이번에야 말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별동대 20만을 새로 편성하여 자신의 오른팔인 좌효위대장군 방효태에게 주고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토록 하라"고 명 하였는바, 방효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모두 자결하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아들 13명 모두를 데리고 고구려를 향해 대대적으로 출발하였다.

신라역시 백전노장의 김유신에게 5만의 대병력을 주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명 하였다.


[풍전등화] 고구려는 이대로 멸망하는가 ?


당과 신라에 파견되어있던 밀정으로부터 이러한 소식은 속속 평양성으로 전해졌다. 고구려의 조야에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장칸은 곧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여한 30여명의 대신들중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이 침묵만 계속 흘렀다.

암울한 영양황제로 인해 이미 국력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버린 고구려는 이미 당나라에 비해 양국간의 국력차이나, 병력차이가 너무 심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병석에있어야 할 연개소문이 무장을 하고 어전회의에 들어왔다. 병색이 완연한 연개소문은 칸에게 절한후,천천히 말했다....  
 연개소문은 이 새로운 위기상황에 대하여 작전의 포커스를 지원군인 방효태의 별동대20만에게 맞추었다.

 

"지금 평양성에 와있는 소정방군은 이미 사기를 잃어 이빨빠진 호랑이 상태이고, 노련한 김유신의 5만지원군은 전선의 상황을 보아 전투에 임할것이므로, 문제는 새로 편성되어 투입되는 방효태의 별동대 20만으로써, 욕망이 높은 방효태는 소정방군과 연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평양성을 공격,점령하려 할 것이며, 그러기위해서는 가급적 빨리 평양성 동쪽에 도달하기 위해 진로를 패수의 상류인 "사수"로 잡고 통과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라군은 서라벌을 서둘러출발하기는 했으나 도성을 벗어나자 곧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과 남산에게 각 기병 오천기씩을 주어 한밤중에 소정방군을 좌우에서 공격토록 하였다.

 

불시에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소정방군은 지리멸렬하여 많은 군수물품을 내버린채 평양성 서북쪽 20리밖으로 후퇴한 후, 지원군인 방효태군 및 신라군을 기다리며, 혹시 또 있을지 모를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경계하는데에 여념이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한편, 구련성(지금의 북중국 러시아지방)의 고선나와 대진성(지금의 만주,연해주지방)의 연정토에게 파발말을 보내 각1만을 인솔하여 사수로 오도록 명하고,  중병중임에도 자신의 아들 모두를 데리고 1만의 정예군을 인솔하여 눈보라를 뚫고, 2일 동안 주야겸행으로 강행군하여 전략지인 패수 상류인 사수에 도착하여 고선나,연정토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대형석거(바위나 큰돌을 쏘아 올리는 기계)를 대규모로 제작하여 사수강 양쪽 10여리에 거쳐 병사들과함께 위장 배치시켜놓고 방효태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렸다.(사수는 강폭이 비교적 좁고, 때는 겨울이라 얼어있었다.)

 

  "설마..."

 

설마.., 소정방군에게 포위되어있는 평양성의 고구려군이.. 그것도 이렇게 빨리 사수에 도착해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효태와 아들13명이 이끄는 별동대 20만은 사수에 다다르자 얼어있는 강을 확인한 후, 12열 횡대(약10리에거쳐 12열의 횡대편제로 구보하는 군의 이동형태)를 갖추어 신속하게 도하하기 시작했다. 방효태군의 상당부분이 강위에 올라서자 연개소문의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한놈도 살려두지 말라!"

 

강 양쪽에서 고구려군의 대형 발석거로부터 커다란 돌들이 비오듯 강을 향해 퍼부어졌다. 바위돌들이 떨어지자 얼어붙은 강의 얼음이 굉음을 내면서 갈라졌고, 방효태군은 강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말그대로 생지옥이요, 아비규환이었다. 요행히 얼음물을 헤엄쳐 나온 당군은 대기해있던 고구려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다.

 

" 본국에서 보낸 지원군 20만이 중간에서 없어졌다 "

 

공격개시 반나절 후...,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그리고 지원군 20만대군은 한명도 없이 모두 죽었다. 20만 지원군이 중간에서 증발하고 만 것이다. 연사에 당시의 현장 기록이 있다. " 당군의 시체가 얼음에 싸여 패수 50여리를 뒤덮었다"

 

이 전투를 역사에서는 "사수대첩" 이라고 한다.

 

 병법전문가들은 살수대첩보다 이 사수대첩을 더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는 살수대첩 당시는 수양제가 113만 군을 동원할 정도로 고구려는 강대했고 안정되었으나 사수대첩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절반정도로 줄어있었다. 당시 당이 고구려를 정복코저 동원한 군대는 처음 소정방의 20만이었다가 다시 지원군 방효태의 20만과 신라지원군 5만까지 합해도 20+20+4 = 45만 이었다. 이와같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로써 당과 1:1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점는 이순신의 경우도 같다고 봄이 무방할것이다)

 

출처: 한민족 옛 제국을 찾아서, 남개소문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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