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10민주항쟁의 전개과정
1)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투쟁-태풍전야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어 갈수록 민중의 저항 의지는 그에 비례해서 한층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태를 극적으로 뒤집는 사건이 터졌다.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 끝내 목숨을 앗아가고 만 것이다.사건이 터지자 당국은 평소 해왔던 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다.경찰 당국은 박종철 군이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발맞추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검 결과 박군은 수십 군데에 이르는 피멍 자국이 있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이 사건은 곧장 전두환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서 발표와 추도미사 및 기도회, 항의농성 등도 잇따랐다. 이같은 민중의 거센 항의 열기에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는 통일민주당 창당을 선언했다. 통일민주당의 창당은 미국의 주도 아래 진행된 보수대연합 시나리오가 파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고 마침내 전두환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즉각 거센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각계각층속에서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서명과 농성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전두환 정권의 폭정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이 다투어서 반독재 합류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급속도로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 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했던 것이다. 민중은 경악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민중의 분노는 한 점의 불꽃만 당기어진다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기세였다. 이제 민중의 분노만 담아 낼 그릇만 준비하면 되었다. 이러한 여망을 딛고 마침내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묶어 세운'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다. 민중들은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범민주세력이 하나로 단결되었음을 보았다.
2) 항쟁이 시작되다-6월항쟁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같은 육사 11기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손을 마주 잡고 치켜올림으로써 권력승계 절차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날의 잠실 체육관은 분노한 민중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이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는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6월항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이날 서울에서만도 30여 군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초조해진 경찰은 해가 지자 더욱 포악해져 무차별 폭행을 가하면서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다. 그러던 중 서울 도심의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갔다. 밤 10시가 되자 8백 명으로 불어난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맹렬한 투석전을 벌여 경찰을 밀어내고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이것이 전국을 휩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시작이었다.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 전국 16개 도시에서 항쟁 기간중 최대 인파인 1백50만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파고는 높아지고 경찰력은 한계가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의 일각에서는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급속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정작 분노한 민중은 정권의 군투입 위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이 투입되면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가 민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군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했던 것은 부마항쟁의 주역이었던 부산시민이었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를 갖고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던 것이다. 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으며 그 중에서도 광주시민에게 준 영향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의 세례를 받은 뒤 새롭게 투쟁의 현장에 나선 상태였다. 광주민중항쟁의 불씨가 전국에 퍼져 나가 마침내 수많은 불기둥을 만들어낸 순간이 바로 1987년 6월항쟁이었던 것이다. 이제 광주는 더 이상 외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서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미 6월 20일부터 백악관에 한국대책 특별반을 편성하여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결국 6월 29일 한국의 텔레비전에는 노태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의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이 민중을 뿌듯하게 했던 것은 거듭되는 군투입 위협에 맞서 항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군투입 기도를 파탄시켜 내면서 끝내 항복선언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총칼의 위협 앞에 맥없이 굴복해야 했던 굴종의 시대를 자신의 손으로 마감한 것에 대한 벅찬 환희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6월항쟁은 기나긴 압제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매듭 하나를 푼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민중의 마음가짐은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뚜렷이 표현되었다. 6월 9일 직격탄에 맞아 여러 날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 광장에는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군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였다.
3) 7∼9월 노동자 대투쟁-깨어나는 사람들 6월항쟁은 결코 6·29선언으로 종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투쟁의 파고를 준비하는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한 승부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제부터다'라고 외치며 박차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으니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권력이 거대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자신의 힘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선진 노동자들로 하여 그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적극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거리에서 타오른 6월항쟁의 불길이 노동현장으로 옮겨 붙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1987년 7월 3일, 우리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다. 현대엔진노조의 결성은 즉각적으로 울산 전역을 노동자 투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다. 일단 치솟은 투쟁의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부산, 거제, 마산, 창원으로 번져 갔고, 이윽고 서울, 인천, 부천, 구로, 안양, 군포, 성남 등 수도권으로 옮겨 붙기에 이르렀다. 또한 업종별로도 제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운수업, 광업, 사무·판매·서비스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동안 새롭게 결성된 노동조합은 자그만치 1,060개. 이는 지난 1980∼86년 동안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치였다. 아울러 대투쟁 기간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건수는 3,458건으로 하루 평균 40여건 씩 터져 나온 셈이었다. 이는 1986년 하루 평균 0.76건에 비해 무려 50배나 증가한 것이며, 1980년 봄의 노동자투쟁(총 407건)보다 8배나 증가한 것이었다. 가히 봇물 터지는 듯한 기세였다고 할 수 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억압 질서를 뒤흔들어 놓으면서, 끝내는 그것을 뒤엎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는 비로소 강력한 엔진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세상을 뒤흔든 100일'이었다
2. 610민주항쟁의 의미
1) 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 다시 15년이 지났다. 이 시기에 많은 좌절과 고통이 있었지만, 우리 역사에서 6월항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폭제였으며, 6월항쟁 이후의 시기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시기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6월항쟁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와 개혁의 원천이자 원동력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6월항쟁은 우리 시대의 소중한 기억이자 자산인 것이다. 반면 6월항쟁 이후의 상황을 평가할 때 민주주의 발전은 제한적이고, 수많은 개혁이 좌절되었으며, 지역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민족통일의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이것은 6월항쟁의 역사적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6월항쟁을 기억하거나 단순 재생하는 것만으로는 21세기를 준비할 수 없다. 6월항쟁에 대한 추억만으로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역주의세력과 수구세력을 극복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6월항쟁을 통해 광주항쟁의 좌절을 훌륭하게 극복했던 것처럼, 6월항쟁을 기억하되 기억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21세기적 관점에서 6월항쟁을 극복하는 제2의 6월항쟁을 통해 6월항쟁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는 역사적 진보의 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문보기: 87년 6월항쟁의 현재적 의미/ 정대화(상지대 교수)
2) 6월항쟁의 현재적 과제 1987년의 6월항쟁은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 명 이상이 참가해 20여일 동안 전개한 반독재민주화 투쟁이었다. 상당수 국민들은 그 자신 6월항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쟁취한 주인공의 하나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6월항쟁은 우리사회 구석구석의 잠재력을 동력화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국민의 사회의식을 폭넓게 일깨웠다. 그에 따라 노동자·농민·청년학생은 물론 지식인·예술인·교사·종교인들도 분야별로 다양하게 결집해 세력화와 조직화를 이루었으며 시민운동·환경운동 등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6월항쟁의 성과들은 장차 새로운 사회발전을 향해 나가는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6월항쟁 이후 이미 우리는 15년이라는 또 다른 역사 축적을 이루어 왔다. 이제 그런 축적에 합당한 새로운 역사발전을 이끌어 낼 때가 되었다. 지난날의 허위와 왜곡과 강압으로 헤매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와 성장을 겪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대중의 투철한 변혁운동에도 불구하고 이 성과들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함으로써 시행착오를 반복해 왔다. 오늘 우리는 이 과제들을 15년 전의 6월항쟁 정신을 이어 극복해야 한다. 6월항쟁의 기본정신인 민주화, 민족자주화, 평화통일의 과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6월항쟁의 과제는 여전히 추구되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원문보기: 6월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자/ 안병욱(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3) 6월항쟁의 세계사적 의의 여타의 나라와 달리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그 지속성과 견결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남미와 아시아의 민주화투쟁이 특정 계기를 통해서 극적으로 표출되는 양상을 보이고 희생 역시도 군사쿠데타와 같은 극적 계기에서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데 반하여, 한국에서는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독재정권 시대에 지속적인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도 누적적으로 이루어졌다. 1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죄판결, 해직, 학사징계의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으며, 사망, 행방불명, 상이 등의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이 1,295명에 이르고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세계적인' 역사,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범적인 투쟁의 역사는, 책에서 본 서구의 역사 속에만 존재하고 있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한국민주화투쟁의 역사는 우익군부권위주의정권이 풍미하던 60년대 이후 세계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화투쟁은 한 세대 이상을 관류하였던, 그리고 '반동'의 물결이 몰아치던 60,70년대 세계사 속에서 세계민주진보진영의 한갈래 희망이자 빛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0·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당시 서구 뿐만 아니라 제3세계에서 독재의 그늘 아래 신음 하던 제3세계 민중들에게는 모방하여야 하는 투쟁의 전범이었다. 광주민주항쟁을 포함하여 전투적인 우리의 투쟁은 아시아 후발산업화 과정에서의 개발독재체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사수하기 위하여 야수적인 집단학살에 맞서서 가장 선진적으로 투쟁했던 사례로 우리 자신에게서부터 인식되어야 한다. |